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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5. <부정공>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공휘이정행장(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公諱爾鼎行狀)
1. 문헌 목록 〉14. 14世 〉27. <부정공>첨사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치형묘지(僉使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致亨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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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부정공>통훈대부행운산군수공휘하형묘지명(通訓大夫行雲山郡守公諱夏亨墓誌銘)
通訓大夫行雲山郡守公諱夏亨墓誌銘 夫士之行世得其中者盖寡矣顚冥富貴者未免有老鳳飢烏之誚果於忘世者不知不仕無義之義多見其惑也獨君子時行時止惟其所遇焉而己湖南之昇平府有趙雲山諱夏亨公早年操藝入京師得君爲蒞官理民之職未幾退老于野烈則時其出處者非耶謹按狀公字養卿玉川人其始祖諱璋在麗朝爲檢校大將軍其後忠義簪組奕世不替三傳至諱元吉文科門下侍中定策勳封玉川府院君諡忠獻號農隱與圃收陶冶諸賢匹休並名當時有五隱之稱生諱瑜號虔谷司馬文科副正時麗俗貿貿不行三年喪公獨廬墓三年致哀見麗運訖杜門自靖至本朝除漢城判尹不就 世宗命旌其閭後享謙川祠生諱崇文兵使逮 光廟丙子與六臣諸公謀復 上王而事不諧父子被刑卒 贈兵曹判書諡節愍子哲山 贈敎官並腏食于莊陵壇謙川祠高祖諱愷朝家以節愍之後特 除禮賓寺參奉曾祖諱宗元奉事壬辰趙高霽峯幕所祖諱蓂贈軍資監正考諱允纘 贈參議妣淑夫人前後皆光山金氏而龍弼其外祖也公後妣出 顯宗乙巳登武科丙午 除宣略將軍丁未振威將軍戊申保功將軍陞宣傳官 肅宗丙辰六月禦侮將軍行訓錬院判官七月授五衛都摠府都事丁巳行全羅左道水軍虞侯戊辰陞通訓階出爲雲山郡守素稱劇邑而公比至民皆安堵一日忽歎曰人生幾何不能行胷臆雖百歲猶夭也遂息意進取於是投劾而歸作白鷗詩以自况其詩曰爾之白雪之白有何累清江浴物外友吾與爾莫謂我紅塵客性恬澹輕財好義妻父李氏家裕而無嗣公力求其族子爲李氏後田宅器物盡付所後絲毫無犯公之廉公如此則百行可推也公以 肅宗癸未十月十五日卒距其生 仁祖丙子壽六十八葬順天松江面山別里負丑之原配淑人陽城李氏轍女後公九年而卒辛亥六月十七日合封于公墓四男二女男長世熙次世㝡世興世亮世興世亮異母出皆以蔭爲通德郎女廣州李泰根贈參判靑松沈鳳祥正臣檜壽東觀羅州林갾全州李齊樞妻長房出二房無育取長房子東觀子之東晋東晳申昌和妻三房出東沃東懋東啓偰亨佐妻四房出李泰根三男二女李行迪 贈資憲李行相郡守李行德都事洪漢相沈始免其婿沈鳳祥男履道其下多不盡錄而玄孫基賢文學質行見稱於世從宋性潭遊先生每激賞以待之銘曰操縱百里之命泯然歛之於白鷗歌一闋彼燈臺不返者過玆邱則寧不愧屈 善山 柳相基 謹撰 통훈대부행운산군수공휘하형묘지명(通訓大夫行雲山郡守公諱夏亨墓誌銘) 무릇 선비의 처세함이 「行世」 도리에 「中道」 맞는 경우가 적으니 한결같이 부귀를 탐한 자는 늙은 봉과 주린 까마귀와 같다는 꾸지람을 면치 못하고 세상을 등지기로 결심한 자는 벼슬을 아니하면 충의가 없다고 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니 그 미혹(迷惑)함을 많이 보겠도다. 호남의 승평부에 운산(雲山) 조하형(趙夏亨)은 젊어서 문예에 정통하여 서울에 가서 임금을 배알하고 목민관(牧民官)이 되었다가 미구에 초야에 물러나 늙었으니 이 분이 바로 나아감과 물러남에 때를 잘 택한 분이 아니겠는가. 삼가 공의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자는 양경(養卿)이요, 옥천인인데 증조 봉사공 휘 종원(宗元)은 임진년에 의병을 모집하여 고제봉(高霽峯)의 군막에 임하였다. 조휘 명(蓂)은 증 군자감정(軍資監正)이요, 고 휘 윤찬(允纘)은 증 참의(參議)이며, 비는 숙부인으로 전후가 다 광산김씨이고, 용필(龍弼)이 그 외조이며, 공은 후비(後妣)소생이다. 현종 을사(一六六五)년에 무과에 올라 병오년에 선략장군(宣略將軍), 一六六七년에 진위장군(振威將軍), 무신년(一六六八)에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선전관(宣傳官)에 올랐다. 一六七六 숙종 병진년 六월에는 어모장군행훈련원판관으로, 七월에는 오위도총부도사를 제수받고 一六七七년에 전라좌도 수군우후를 지내고 一六八八년에 통훈대부계질에 올라 외직으로 운산군수(雲山郡守)가 되었는데 운산이 본디 어려운 읍이나 공이 다스리매 백성이 안도(安堵)하였다. 공이 어느 날 문득 탄식하되 『인생이 얼마인가 능히 포부를 행하지 못하면 비록 백세라도 오히려 일찍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하고 마침내 진취할 뜻을 버리고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와 백구시(白鷗詩)를 지어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 시(詩)에 가로되, 너의 깨끗함이 흰 눈과 같으니 무슨 더럽힘이 있으리오 爾之白雪之白有何累 맑은 강에 목욕하고 세속을 떠나 내 너와 함께 노니 清江浴物外友吾與爾 나를 홍진객이라 이르지 말라. 莫謂我紅塵客 하였다. 천성이 고결하여 재물을 가벼이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다. 처가에 재산은 넉넉하나 후사가 없으니 공이 그 족자(族子)를 힘써 구하여 이씨 후사를 삼고 전택(田宅) 기물(器物)을 실오라기 하나도 손대지 아니하고 다 내어주었다. 공의 청렴 공정함이 이와 같은즉 기타 백 가지 행실을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 숙종 계미년 十월 十五일에 향년 六十八세로 별세하여 순천 송광면 산별리 축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는 숙인 양성이씨(陽城李氏)로 철(轍)의 딸인데 공보다 九년 뒤인 신해년 六월 十七일에 별세하여 합봉하였다. 공의 四남은 세희(世熙)·세최(世㝡)·세흥(世興)·세량(世亮)인데 다 음직(蔭職)으로써 통덕랑(通德郎)에 되었고, 二녀는 증참판 광주 이태근(李泰根)과 청송 심봉상(沈鳳祥)에게 출가하였다. 정신(正臣)·회수(檜壽)·동관(東觀)·나주 임인(林갾), 전주 이제추(李齊樞)의 처는 장방(長房)의 출(出)이요, 이방(二房)은 아들이 없어 장형 아들 동관을 양자하였다. 동진(東晋)·동석(東晳)·신창화(申昌和)의 처는 三방 출이요, 동옥(東沃)·동무(東懋)·동계(東啓)·설형좌(偰亨佐)의 처는 四방 출이다. 이태근(李泰根)의 三남 二녀 중 이행적(李行迪)은 증자헌대부요, 이행상(李行相)은 군수이며, 이행덕(李行德)은 도사(都事)이고 홍한상(洪漢相)·심시면(沈始免)이 그 사위이다. 심봉상(沈鳳祥)의 남은 이도(履道)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치 못한다. 현손 기현(基賢)이 문학과 행의가 탁월하여 송성담(宋性潭)을 종유(從遊)하니 선생이 매양 칭찬하며 후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명(功名)을 헌 신짝같이 버리고 돌아와 백구가(白鷗歌)를 부르며 한 평생을 마치니 저 탐관오리의 무리가 이 언덕을 지난다면 어찌 부끄러워 몸을 굽히지 아니 하겠는가. 善山 柳相基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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